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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FOCUS 2026.10.04
column

브로맨스는 면죄부가 될 수 없다… ‘포핸즈’가 놓쳐버린 피해자의 자리

2026.09.30 · 장민혜
포핸즈, 송강, 이준영, 드라마

사진 = tvN 포핸즈 공식 홈페이지

[씬포커스 = 장민혜 기자] 시청률은 올랐지만 서사는 어디로 갔나…관계성에 집착한 ‘포핸즈’, 피해자의 고통마저 두 남자의 관계를 위한 장치로 만들었다

tvN 토일드라마 ‘포핸즈’를 흥행 실패작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직 정확하지 않다. 적어도 숫자는 그렇다. 지난 8월 29일 전국 시청률 3.4%로 출발한 작품은 2회에서 5.9%로 뛰었고, 8회에서는 7.9%까지 상승했다. 9회와 10회 역시 전국 평균 7.2%를 기록했다. 10회까지 케이블·종편 동시간대 선두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시청률만 놓고 ‘포핸즈’를 실패작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상하다. 숫자가 올라갈수록 이 드라마가 처음 무엇을 이야기하려 했는지는 오히려 흐릿해졌다. 피아노라는 음악적 소재를 가운데 두고 두 천재 소년의 경쟁과 우정, 열등감과 동경을 그리겠다던 이야기는 어느 순간 납치와 총격, 기억상실과 복수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포핸즈’가 끝까지 놓지 않은 것은 음악도, 성장도 아니었다. 강비오와 최정요라는 두 남자의 ‘관계성’이었다.

문제는 그 관계 자체가 아니다. 두 남자가 강렬한 우정을 나누는 것이 문제일 이유는 없다. 남성 캐릭터 사이의 섬세한 감정을 로맨스 못지않은 밀도로 다루는 것도 충분히 흥미로운 선택이다. 문제는 ‘포핸즈’가 그 관계를 보여주는 방식이다.

초반부부터 작품은 명백히 로맨스 장르에서 익숙하게 사용되는 연출 문법을 두 사람에게 적용했다. 무대 공포증에 시달리는 최정요를 위해 강비오가 연습실을 촛불로 채우고, 지하철 승강장에서는 상대의 등을 피아노 건반처럼 두드린다. 나란히 앉아 서로의 어깨에 기대 잠이 들기도 한다. 실제로 방영 초기부터 일부 시청자 사이에서는 두 사람의 관계가 “BL을 연상시킨다”는 반응이 나왔고, 언론 역시 ‘사랑보다 멀고 우정보다는 가까운’ 관계라는 식으로 두 사람의 모호한 거리를 주요 관전 요소로 다뤘다.

여기까지라면 하나의 연출 전략이다. 그러나 ‘포핸즈’는 관계를 규정하지 않은 채 그 모호함에서 발생하는 긴장만 반복적으로 소비한다. 우정이라고 설명하면서 로맨스의 화면을 사용하고, 경쟁이라고 말하면서 이별과 재회의 감정을 가져온다. 갈등이 벌어지면 사랑싸움처럼 찍고, 화해하면 다시 서로만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돌아간다. 말하자면 이 드라마는 두 사람의 관계가 무엇인지 이야기하기보다 두 사람이 특별해 보이는 순간 자체를 생산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사용한다.

그래서 브로맨스가 과해서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브로맨스가 서사를 대신하기 시작했다는 것이 문제다. 초반에는 그것이 효과적이었다. 1회 3.4%였던 시청률은 두 사람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부각된 2회 5.9%로 크게 상승했다. 당시에도 일부에서는 BL 코드를 의도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고, 동시에 이 전략이 일반 청춘극 시청자와 특정 관계성을 기대하는 시청자 사이에서 양날의 검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러나 ‘포핸즈’의 더 큰 문제는 후반부에서 발생한다. 최정요는 9년 전 납치됐다. 납치 과정에서 총격을 당했고, 결국 피아니스트의 길을 잃었다. 그의 인생은 완전히 바뀌었다. 작품 초반 두 사람이 함께 꿈꿨던 미래에서 추방된 사람은 최정요였다. 그리고 그 범죄를 사주한 사람은 강비오의 어머니 강지혜였다. 강지혜는 자신의 아들을 위해 경쟁자인 최정요를 제거하려 했다. 9회에서 강비오가 이 사실을 알게 되자 강지혜는 자신의 범행을 ‘아들을 위한 선택’으로 정당화하고, 사실이 밝혀진다면 차라리 죽겠다는 식으로 아들을 압박한다. 결국 강비오는 피해자에게 진실을 밝히지 못한다.

바로 이 순간부터 ‘포핸즈’의 윤리적 중심은 기묘하게 움직인다. 당연히 이야기의 가장 큰 질문은 이것이어야 한다. 최정요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그런데 드라마가 더 오래 바라보는 질문은 다르다. 강비오는 이 사실을 알고 얼마나 괴로운가. 어머니를 버릴 수도 없고 친구를 외면할 수도 없는 강비오의 고통이 강조된다. 어머니가 저지른 범죄 앞에서 아들이 겪는 죄책감과 갈등이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다.

물론 강비오는 납치를 직접 지시한 가해자가 아니다. 이 점은 분명히 구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그는 범죄 사실을 알게 된 뒤 피해자에게 진실을 알리지 않는 선택을 한다. 그리고 10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최정요가 자신도 사건에 연루돼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범행을 밝히지 않고, 모든 일을 자신이 저질렀다고 인정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희생처럼 보이지만 피해자의 관점에서 보면 전혀 다르다. 가해자가 누구인지 알 권리마저 빼앗기는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 시점부터 드라마는 최정요를 ‘복수하는 사람’으로 만든다. 최정요는 강비오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연주를 압박하고, 결국 피아니스트 교체를 통보한다. 관련 기사들 역시 이를 ‘서늘한 복수’라는 표현으로 소개했다.

여기서 시청자는 묘한 감정적 위치에 놓인다. 납치당한 사람은 최정요다. 총을 맞은 사람도 최정요다. 피아니스트라는 꿈을 잃은 사람도 최정요다. 9년의 시간을 빼앗긴 사람 역시 최정요다. 그런데 현재 시점에서 화면 속 ‘잔인한 사람’처럼 보이기 시작하는 인물 또한 최정요다. 반대로 강비오는 고통받고, 죄책감을 느끼고, 손가락 이상을 겪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서려 한다. 할아버지의 조언을 받고 재기를 결심하는 성장 서사까지 부여받는다. 피해자의 복수는 냉혹함이 되고, 가해자 가족의 고뇌는 인간적인 비극이 된다.

바로 이 지점이 ‘포핸즈’ 후반부가 가장 위험한 이유다. 좋은 복수극은 피해자를 완벽하게 선한 인간으로 만들 필요가 없다. 피해자가 분노할 수도 있고 잘못된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런 복잡함이 인간을 입체적으로 만든다. 하지만 그 전에 필요한 것이 있다. 피해자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를 충분히 바라보는 시간이다. 최정요에게는 그것이 부족하다. 납치 이후 9년 동안 그가 무엇을 잃었는지, 총격으로 피아노를 포기해야 했던 순간 무엇을 느꼈는지, 자신에게 그런 일을 벌인 사람이 누구인지조차 모른 채 살아온 시간이 어떤 것이었는지를 드라마는 상대적으로 짧게 통과한다. 대신 그 고통은 다시 강비오와 최정요의 관계를 흔드는 장치가 된다.

납치도 두 사람을 갈라놓기 위해 존재한다. 총격도 두 사람을 9년 동안 헤어지게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기억상실 연기도 재회의 긴장을 만들기 위해 존재한다. 그리고 가해자의 정체마저 두 남자가 서로를 오해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한다. 결국 최정요가 겪은 거대한 범죄조차 두 남자의 관계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서사적 연료가 되어버린다. 그래서 ‘포핸즈’의 브로맨스는 후반부에 이르러 오히려 작품의 약점으로 돌아온다. 관계가 이야기에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가 관계를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가까워져야 하니 촛불을 켠다. 두 사람이 갈라져야 하니 경쟁시킨다. 두 사람이 오래 헤어져야 하니 총을 쏜다. 두 사람이 오해해야 하니 가해자를 숨긴다. 두 사람이 다시 충돌해야 하니 피해자를 복수자로 만든다. 이렇게 되면 인물의 인생은 더 이상 인물 자신의 것이 아니다. 모두가 강비오와 최정요의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기능이 된다. 특히 범죄 피해자의 삶까지 그 관계를 극적으로 만드는 재료가 되는 순간, 문제는 단순한 개연성을 넘어선다.

이 작품이 피해자를 바라보는 방식에 관한 문제가 된다. 물론 ‘포핸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9월 30일 현재 12부작 가운데 10회까지 방송됐고, 11·12회는 남아 있다. 마지막 두 회에서 최정요의 시점을 충분히 복원하고 강지혜의 범죄에 책임을 묻는다면 지금까지 기울어진 서사의 균형이 어느 정도 바로잡힐 가능성도 있다. 따라서 지금 ‘포핸즈’를 ‘흥행 실패작’이라고 선언하기에는 이르다. 오히려 질문은 다른 곳에 있다. ‘포핸즈’는 무엇을 흥행시키는 데 성공했는가. 송강과 이준영이라는 두 배우의 조합은 성공했다. 두 남성 캐릭터의 관계성 역시 화제를 만들었다. 브로맨스와 로맨스 사이를 오가는 연출도 수많은 클립과 이야깃거리를 생산했다. 실제로 작품의 화제성과 시청률 상승에서 두 배우의 관계가 주요 동력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관계성을 성공시키는 것과 이야기를 성공시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두 인물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과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를 설득하는 것 역시 다르다. ‘포핸즈’가 마지막까지 강비오의 죄책감과 두 남자의 관계 회복을 위해 최정요의 피해를 소비한다면, 이 드라마가 남기는 가장 큰 실패는 시청률표에서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큰 실패는 누구의 고통을 이야기의 중심에 놓아야 하는지 끝내 선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삶을 빼앗겼는데도 카메라가 오래 바라보는 것은 가해자의 가족이 흘리는 눈물이라면, 아무리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도 그 불균형을 덮을 수 없다.

브로맨스는 관계를 풍부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브로맨스가 피해자의 자리를 대신할 수는 없다. 그리고 어떤 관계성도 범죄와 피해를 낭만적인 비극으로 바꾸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장민혜 기자 contact@scenefocus.kr